안녕하세요!
최강의 성동구 논술! 국어의 키 입니다 :)
국어의 키 원장님께서 직접
강신주, 지승호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핵심 요약을 준비했습니다!
다섯번째 요약본 !!
지금 바로 만나보실까요 ?
▲ 네번째 요약본 ▲
☆ 이윤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아닌 좋은 책의 핵심을 요약한 책의 다른 시선입니다 ☆
아홉 번째 만남, 글, 책, 담론들
철학자는 그런 것 같아요. 익숙했던 것을 낯설게 만들고, 낯선 것도 익숙하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철학자는 대개 특정사회나 특정 시대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죠. 익숙한 삶 혹은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삶을 뒤흔드니까요.
다른 사유가 다른 세계를 구성한다
배운다는 것은 과거를 배우는 거예요. <철학 VS 철학>은 과거 철학적 사유들을 제 나름대로 일관적으로 정리하고 철학적으로 평가한 결과물이에요. 그동안 제 안목이 커졌고, 비판적 정신을 날카로워졌어요. 이 책을 통해 저는 철학적 사유의 최전선에 서게 된 거예요. 강신주가 현재에 설 수 있는 그리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등불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거죠.
책의 의미
‘파르마콘’ 약이면서 독이라는 뜻이에요. 책은 전형적인 파르마콘이죠. 시나 소설 혹은 역사책도 그렇지만, 철학책은 우리의 삶, 사회, 그리고 시대를 낯설게 혹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도록 하는 힘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낯섦과 거리감이죠. 내 삶의 형식도 절대적이지 않고, 다른 지역 사람들의 삶의 형식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감각이 생기니까요. 그러니 내 삶의 형식도 반성할 수 있고 동시에 다른 삶의 형식도 성찰할 수 있는 거예요.
철학은 사유를 비판하는 특징이 있어요. 생각들을 진단하고, 잘못된 생각을 폭로해야 되는 거예요. 당신 생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생각을 상대화한다고 할까요. 당대에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시대의 기독교 사회, 유학 사회도 있었잖아요. 역사가 흐르면 그 상대적인 것이 밝혀지기도하고, 다른 지역이나 문화로 가면 당신들 생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어요.
철학은 잘못된 사유, 그러니까 일종의 선글라스 같은 것을 벗기는 작업을 해야 돼요. 객관은 주관의 객관이고, 주관은 객관의 주관인 거예요. 우리가 보는 거죠. 뱀이 보는 세계와 우리가 보는 세계는 달라요. 그래서 철학은 주관과 객관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관이라는 것이 사유고, 내가 느끼는 거잖아요. 내 마음이나 사유가 달라지면 세계는 다르게 느껴지는 거예요.
젊은이들이 텍스트를 읽지 않는 시대
고전이 되어버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고 니체는 미소를 지을까요? 아닐거예요. 고전! 책이 아니라 교과서인 거죠. 교과서 지정의 주체는 권력자거든요. 21세기 현재 인류 사회는 정보화된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예요. 이제 자본은 국가라는 경계도 넘어서려고 하고, 심지어 자본가마저 초월하려고 해요. 점점 자본은 네트워크화 되면서 시공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시공에 내재하는 신이 되어버리고 있죠. 이 대목에서 고전의 목록이 만들어지는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고전으로 승격시킨 이유는 첫째 개개인의 영혼을 일깨우는 책을 ‘교과서’로 만들겠다는 전략이에요. 나아가 니체나 마르크스의 책이 19세기 텍스트라는, 다시 말해 과거의 텍스트라는 인상도 심어 줄 수 있죠. 둘째는 억압체제에 저항했던 소수의 책을 목록에 넣음으로써 억압체제를 정당화하는 다수의 체제 지향적 책들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의도일 거예요. 이를 통해 니체나 마르크스의 책은 다양한 견해들 중 소수 의견이라는 인상도 강화하죠.
억압체제가 존재하는 한, 인간의 자유 정신이 고갈되지 않는 한, 니체나 마르크스의 책은 고뇌하는 영혼을 불태울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력을 가지고 있어요. 니체, 마르크스, 장자, 나가르주나 등의 책들은 ‘교과서’에서 벗어나 ‘책’이 될 것이고, 특정 시대의 소수의견이 아니라 자유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자유인들의 다수 의견이 될 테니까요.
젠더 갈등, 노동자와 노동자의 갈등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차를 가로질러
모든 개개인에게 보편적 성찰의 계기를 주어야 철학자일 거예요.
한나 아렌트는 그래서 철학자라 할 수 있어요.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의 문제를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 사이의 문제로 숙고하고, 나아가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의 반목이 아니라 유대나 연대를 통해 자본과 맞서야 해요. 이것이 제 근본적인 입장이에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구조적으로 분할해 노동 계급을 무력화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는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를 분할하려고 하죠. 잊지 말아야 해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갈등과 반목이 커질수록 노동과 자본 사이의 더 근본적인 대립 관계가 은폐되죠. 마찬가지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젠더 갈들이 심해지면 노동과 자본사이의 첨예한 대립 관계가 희석돼요. 어느 경우는 자본계급은 ‘자기들끼리 싸우네’하면서 미소를 짓겠죠.
벤담적 여성이 ‘차별’을 이야기하고, 벤담적 남성이 ‘역차별’을 이야기해요. 여기서 명령하는 자와 명령을 듣는 자로 구분되는 억압구조, 억압 구조를 경쟁에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라는 구분으로 정당화하고 내면화하려는 경쟁 논리는 어떤 도전도 받지 않아요. 억압구조와 경쟁 논리를 극복해야 돼요. 개개인의 인간을 우열과 열등으로 분류하는 오래된 국가의 매커니즘을 해체하고, 우열과 열등은 누구 탓할 것 없이 타인과의 치열한 경쟁으로, 그러니까 개개인의 노력으로 결정된다는 자본주의적 유혹을 거부해야 하니까요. 철학자로서 제 바람은 단순해요.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는 주장이 ‘여성은 우월하다’는 주장으로 비화되지 않는 거예요.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페미니즘 내부에 스며든 벤담적 자아를 도려내야 하죠.
페미니즘은 국가나 자본의 이간책을 경계해야 돼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페미니즘을 배웠더니 사랑을 더 잘하게 됐다고 하면 좋아요. 페미니즘은 인문주의와 민주주의 혹은 연대와 사랑의 원리가 될 수 있어요. 20대 남성들의 눈에는 더 이상 여성이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인 것 같아요. 저임금, 고용 불안, 일자리 부족이 심화된 상태에서 경쟁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일자리를 정책적으로 보장하는 여성 쿼터제 등이 시행되면서, 그만큼 남성 일자리는 줄어들게 돼요. ‘역차별’ ‘불공정한 경쟁’이니 하는 얘기가 나오는 계기죠.
젊은 남성들은 자신을 포함한 젊은 여성들마저 생계와 생존의 위험에 빠뜨린 주범을 잊고 있어요. 그건 동료 여성이 아니라 자본과 국가 탓이죠 원인을 잘못 진단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어려워요. 오히려 젊은 남성들이 ‘일반 여성’과 ‘페미니즘’과 싸우는 순간, 자본과 국가는 더 용이하게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할 거예요. 경쟁을 강화시킨 자본과 국가를 방치하고, 함께 검투사가 되어버린 젊은 여성들을 적대시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죠. 그래도 희망은 있어요. 사랑이죠. ‘여성 일반’이 아니라 ‘단독적인 여성’이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사람.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는 증거죠. 다행스럽게도 젠더 갈등이 아무리 심해져도 남녀 간의 사랑은 우열의 가치 평가를 넘어서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어요. 바로 여기에 희망이 있어요. 사랑과 연대가 국가나 자본이 강요하는 우열의 감각, 경쟁과 적대의 매커니즘을 붕괴시킬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겠죠.
한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다양한 술어가 있잖아요. 직장인이다, 어디 출신이다, 뭐를 좋아한다, 취미는 뭐다, 그리고 여성이다 등 여러 가지를 붙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다른 속성을 보지 않고 여성이라는 속성만 보게 된다면 파시즘적 사유가 작동한다고 볼 수 있어요. 인문주의자 혹은 민주주의자, 그것도 별거 아니에요. 어떤 사람의 수많은 속성을 동등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인문주의자고 민주주의자니까요. 물론 어느 경우에는 하나의 속성만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차별과 배제, 혹은 우열의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돼요. 오히려 하나의 속성만이 문제가 되는 경우, 그것은 애정과 환대 혹은 긍정의 계기로만 언급되어야 해요. 혹은 어떤 개체가 겪는 고통이나 갈등과 연대하려는 마음으로 언급될 수도 있어요. ‘저분은 환자야.’ ‘할아버지가 걷기 좋게 보도를 정비해야해’, ‘저 사람은 청년 노동자!’등등 바로 이 점이 중요하죠.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개인이니 하나의 속성만 부각될 때도 있지만, 이때 다른 속성들도 그 개인이 가지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요. 달리 말해서 개인이 가진 속성 하나가 그가 가진 수많은 속성을 은폐하거나 부정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개인을 여성으로만 보는 페미니즘과, 어떤 개인은 여성이지만 다른 속성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 페미니즘은 다른 거예요. 전자가 파시즘적 페미니즘이라면 후자는 인문주의적 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죠.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임금을 낮추는 것이 최상의 과제예요. 그래서 이주 노동자든 여성 노동자든 남성 노동자든 상관이 없죠. 공정을 둘러싸고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가 싸우든, 아니면 백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와 싸우든, ‘잘들 놀고 있네’이러는 거죠. 이 도식을 지금 우리 사회에 적용해도 똑같아요. 남녀의 다툼이든, 세대 간의 다툼이든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래서 보부아르가 노동과 자본 문제, 남녀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라고 했을 때, 저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는 거죠. 중요한 것은 젠더 문제가 여성이 가정을 떠나 노동자가 되면서 본격화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 노동자가 되면서 이제 ‘제 2의 성’굴레를 벗어던지려고 해요. 그래서 자본주의사회가 과거보다 뭔가 더 자유로운 사회처럼 보이죠. 그러나 생산의 자유는 없고 소비의 자유만 있을 뿐이에요. 채용의 자유는 없고 원서를 낼 자유만 있을 뿐이요. 자발적 노예, 출퇴근의 노예의 자유죠.
스포츠라는 것은 일단 노동계급 자체의 교육장이기도 해요.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고액 연봉을 받는다. 이런 논리를 연습시키는 거예요. 시장의 논리가 정확하게 반영된 것이 프로 스포츠고요. 그걸 소비하고 즐기면서 노동계급 스스로 경쟁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거죠. 경쟁에서 승리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하는 논리를 받아들이면, 내가 돈을 적게 버는 것은 경쟁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개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돼요. 노동자이면서 소비자인 사람들한테 제공되는 교육의 장이 두 개의 공간으로 대표될 거예요. 하나는 마켓, 소비를 하는 곳으로 돈의 우월함을 배우는 장이에요. 다른 하나는 경기장, 경쟁의 논리를 교육하는 장소예요.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어떤 선수는 천문학적인 연봉과 이적료로 명문 클럽으로 이적하기도 해요. 그 사이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인 거죠. 반대로 어떤 선수는 구단에서 능력이 없다고 쫓겨나기도 해요. 정리해고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죠. 이러한 억압체계가 경쟁의 콜로세움을 만들어 놓고 빠져나간 형국이에요. 억압체제는 말해요. 참여하기 싫으면 경쟁에 참여하지 말라고요. 그건 너의 자유라고.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전대미문의 간교함이죠.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노동력을 팔지 안 팔지는 너희들의 자유라고 궤변을 늘어놓으니까요.
스포츠, 특히 축구나 야구와 같은 프로 스포츠는 두 가지 목적에 종사해요. 하나는 노동계급이 프로 스포츠 관람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남루한 현실을 잊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경쟁 논리를 노동계급의 내면에 자연스럽게 각인시키는 거죠. 문제는 스포츠 산업도 자본과 노동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 있어요.
노예제와 노동 자체는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인류가 진보했다고 하는데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얼마나 많은 생태가 파괴되었고, 멸종한 종이 얼마나 많은데요. 다른 종 뿐만아니라 우리 자신도 파괴됐고요. 자본주의는 전대미문의, 우리 인간이 만든 간교한 지배체제나 억압체제라고 보여져요. 진보도 아니고 뭣도 아닌데, 우리가 너무 그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요.
억압의 공식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제가 봤을 때는 좋은 철학자들이고,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쁜 철학자들인 거예요. 나쁜 철학자들은 체제에서 싫어하지 않죠. 연구비를 누구한테 대주겠어요. 플라톤을 연구하는 사람한테 주로 주겠죠. 반면 좋은 철학자들은 왜곡하거나 은폐시키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걸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아요. 양적으로도 그렇고.
민주주의는 역사상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니까요. 폴리스밖에 없었어요. <역사철학·정치철학>은 민주주의에 대한 책이에요. 고대 이집트 시대와 지금의 자본주의 시대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요. 제 의식 속에서는 진보라고 여기지 않아요. 지배의 양식이 타율적 복종을 강요하는 형식에서 자율적 복종을 강요하는 형식으로 심화되었으니, 진보는커녕 진보의 희망마저 사라진 모양새니까요. 마르크스가 밝혔던 것이 그거예요. 먼저 ‘벌거벗은 노동자’로, 물적 생산수단을 없애서 자기 노동력밖에 없는 사람들을 만들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물질적인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자본재를 가지고 있고, 공장을 가지고 있고, 회사를 가지고 있고,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한테 ‘나를 고용해주세요’하고 자기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을 뿐이라고요.
거대 문명이 탄생한 기원전 3000년 이래로 지금까지 인류는 복종의 시대에서 5000~6000년 정도를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분업 체제에 진입을 해서 이 사회 시스템을 벗어나서는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분업의 강도가 세졌어요. 산업화된 시스템에서 하나의 나사가 되지 않으면 생계의 위험에 빠지는 사회인 거예요. 타율적 복종에서 자발적 복종으로 바뀐 것일 뿐인데, 체제는 ‘타율’과 ‘자율’만 강조해서 자본주의사회가 왕조시대보다 더 발달했다고 얘기를 해요.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복종’에 방점을 찍어야 돼요. 노동자들을 정확하게 ‘출퇴근 노예’라고 부르잖아요. 그러면 노예는 이렇게 정의 내리면 되죠. ‘출퇴근이 불가능한 노동자.’
강자에게 복종하지 말고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다
약자를 돌보는 것이 자유인의 자긍심이고
당당한 사람의 자긍심이라고 나는 말했어요.
벤야민의 가장 중요한 논문을 들자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예요. 거기 유명한 ‘아우라’얘기가 나오잖아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는 아우라가 있지만, 티셔츠에 복제되거나, 영화로 복제가 되거나, 머그컵에 복제되면 아우라가 사라진다는 거죠. 핵심은 영화이야기예요. 벤야민에 입장이 영화는 노동계급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영화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노동계급이라는 자각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매체라는 주장이에요. 이것을 비판한 아도르노는 부르주아 사회와 소비문화에 모든 것이 노동계급이기 때문에 깨어 있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노동계급을 계속 깨우쳐야 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입장이었어요. 엘리트 주의자였던 거죠. 벤야민은 영화를 통해서 노동계급이 스스로 리딩을 할 수 있다고 보았어요. 모세가 필요없는. 벤야민을 악용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이유는 굉장히 많아요.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벤야민의 미완의 대저인데, 이 연구 모음집에는 엘리트주의에서 노동자주의로 가는 벤야민의 면모가 담겨 있다는 점이죠. 아도르노는 이 방대한 유고를 엘리트주의나 비판적 평론가의 입장으로 박제하려고 하죠. 당연히 벤야민 사유의 최종적 귀결이자 응결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철학 테제>는 경시될 수밖에 없어요.
가장 명료하게 노동자 중심주의, 노동계급 중심주의, 그리고 땅을 회수당한, 더 이상 소작농이 아닌 소작농들의 사유, 그런 것들이 피력된 유일한 글이 <역사철학 테제>예요. 이 글을 쓰지 않았다면 벤야민은 정리가 안 된 철학자였을 뿐이에요.
저는 제가 서 있는 자리를 당당하게 밝혔어요. 특히나 중요한 것은 정당코뮌주의를 파리코뮌의 평의회코뮌주의로부터 완전히 도려내는 단호함이죠. 정당코뮌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회민주주의로 변주되고, 북한이나 중국 등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회주의로 변주되니까요. 정당코뮌주의는 진보팔이, 노동계급팔이, 민주주의 팔이의 뿌리예요. 저는 파리코뮌과 집강소에 서 있는 철학자예요. 엥겔스와 같이 있던 마르크스가 아니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스파르타쿠스 동맹 옆에 있고자 해요. 카스트로가 아니라 체게바라의 손을 잡고 있어요. 레닌과 트로츠키와 술을 마시기보다 크론시타트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 있으려 해요. 생산수단, 정치수단, 혹은 폭력수단은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 노동계급의 손에 쥐어져야죠. 평의회코뮌주의, 인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는 바로 그런 것이니까요.
제 소망은 제가 죽고 나서도 『역사 철학·정치철학』을 통해 자본 주의와 억압이 유지되는 한 누군가가 ‘강신주가 있어서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됐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명령을 강요하는 사람한테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리고 언제든지 자기 생각을 당당히 피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가 같이 명령을 내릴거야, 그리고 우리가 내리는 명령은 우리가 들을 것이고, 이 명령은 우리가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수정할 거야. 그런 민주주의자가 있다면 좋겠어요. 처음에도 얘기했잖아요. 자유인은 강하다고. 자유인은 강자에게 복종하지 않고, 약자를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진정한 자유인은 그 사람이 약하다고 해서 내 맘대로 끌고 가지 않고, 그 사람이 강하다고 해서 끌려가지도 않아요. 강한 사람한테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렇게 반문할 수 있는 사람, 약한 사람한테는 ‘말해봐, 말해봐, 괜찮아.’라고 얘기하는 사람, ‘말이 없는 것을 보니까 내 말을 따르나봐’라고 속단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자유인이죠.
철학자로 글을 쓰면서 <역사철학·정치철학>을 쓰든 <철학 VS 철학>을 쓰든 자유에 대해 썼어요. 강자에게 복종하지 말고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다, 약자를 돌보는 것이 자유인의 자긍심이고 당당한 사람의 자긍심이라고 나는 말했어요. 어떤 강자라고 해도 그 사람이 힘이 세고 나를 억압한다고 하더라도 강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아야 자유인이라고 배웠으니까요. 당당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고, 최제우가 말했던 하늘처럼 존귀한 님들의 공동체고,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들이 살고 있는 땅, 불국토(佛國土) 예요. 원효가 꿈꿨던 불국토. 누가 자유인의 목을 눌러요. 나를 죽이지 않는 이상 누구도 내 몸에 걸터 앉을 수 없어요. 강자한테는 사자 같은 사람이어야 해요. 그것이 자유인의 전통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 글을 쓰고, 자기 얘기를 쓰는 거죠. 권력이나 자본에 꺾여서 글을 쓰고 책을 내면 뭐 해요.
국어의 키에서 준비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핵심 요약 5부
흥미로우셨나요?
그럼 저희는
다음 포스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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