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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성동구 논술! 국어의 키 입니다 :)

 

국어의 키 원장님께서 직접

강신주, 지승호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핵심 요약을 준비했습니다!

다섯번째 요약본 !!

지금 바로 만나보실까요 ?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저자강신주,지승호출판EBS한국교육방송공사발매2022.03.05.

[강신주 / 지승호] 강신주, 지승호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핵심 요약 (4)

▲ 네번째 요약본 ▲


☆ 이윤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아닌 좋은 책의 핵심을 요약한 책의 다른 시선입니다 ☆


 

아홉 번째 만남, 글, 책, 담론들

 

철학자는 그런 것 같아요. 익숙했던 것을 낯설게 만들고, 낯선 것도 익숙하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철학자는 대개 특정사회나 특정 시대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죠. 익숙한 삶 혹은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삶을 뒤흔드니까요.

 

다른 사유가 다른 세계를 구성한다

 

배운다는 것은 과거를 배우는 거예요. <철학 VS 철학>은 과거 철학적 사유들을 제 나름대로 일관적으로 정리하고 철학적으로 평가한 결과물이에요. 그동안 제 안목이 커졌고, 비판적 정신을 날카로워졌어요. 이 책을 통해 저는 철학적 사유의 최전선에 서게 된 거예요. 강신주가 현재에 설 수 있는 그리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등불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거죠.

 

책의 의미

 

‘파르마콘’ 약이면서 독이라는 뜻이에요. 책은 전형적인 파르마콘이죠. 시나 소설 혹은 역사책도 그렇지만, 철학책은 우리의 삶, 사회, 그리고 시대를 낯설게 혹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도록 하는 힘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낯섦과 거리감이죠. 내 삶의 형식도 절대적이지 않고, 다른 지역 사람들의 삶의 형식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감각이 생기니까요. 그러니 내 삶의 형식도 반성할 수 있고 동시에 다른 삶의 형식도 성찰할 수 있는 거예요.

 

철학은 사유를 비판하는 특징이 있어요. 생각들을 진단하고, 잘못된 생각을 폭로해야 되는 거예요. 당신 생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생각을 상대화한다고 할까요. 당대에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시대의 기독교 사회, 유학 사회도 있었잖아요. 역사가 흐르면 그 상대적인 것이 밝혀지기도하고, 다른 지역이나 문화로 가면 당신들 생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어요.

 

철학은 잘못된 사유, 그러니까 일종의 선글라스 같은 것을 벗기는 작업을 해야 돼요. 객관은 주관의 객관이고, 주관은 객관의 주관인 거예요. 우리가 보는 거죠. 뱀이 보는 세계와 우리가 보는 세계는 달라요. 그래서 철학은 주관과 객관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관이라는 것이 사유고, 내가 느끼는 거잖아요. 내 마음이나 사유가 달라지면 세계는 다르게 느껴지는 거예요.

젊은이들이 텍스트를 읽지 않는 시대

 

고전이 되어버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고 니체는 미소를 지을까요? 아닐거예요. 고전! 책이 아니라 교과서인 거죠. 교과서 지정의 주체는 권력자거든요. 21세기 현재 인류 사회는 정보화된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예요. 이제 자본은 국가라는 경계도 넘어서려고 하고, 심지어 자본가마저 초월하려고 해요. 점점 자본은 네트워크화 되면서 시공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시공에 내재하는 신이 되어버리고 있죠. 이 대목에서 고전의 목록이 만들어지는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고전으로 승격시킨 이유는 첫째 개개인의 영혼을 일깨우는 책을 ‘교과서’로 만들겠다는 전략이에요. 나아가 니체나 마르크스의 책이 19세기 텍스트라는, 다시 말해 과거의 텍스트라는 인상도 심어 줄 수 있죠. 둘째는 억압체제에 저항했던 소수의 책을 목록에 넣음으로써 억압체제를 정당화하는 다수의 체제 지향적 책들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의도일 거예요. 이를 통해 니체나 마르크스의 책은 다양한 견해들 중 소수 의견이라는 인상도 강화하죠.

 

억압체제가 존재하는 한, 인간의 자유 정신이 고갈되지 않는 한, 니체나 마르크스의 책은 고뇌하는 영혼을 불태울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력을 가지고 있어요. 니체, 마르크스, 장자, 나가르주나 등의 책들은 ‘교과서’에서 벗어나 ‘책’이 될 것이고, 특정 시대의 소수의견이 아니라 자유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자유인들의 다수 의견이 될 테니까요.

 

젠더 갈등, 노동자와 노동자의 갈등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차를 가로질러

모든 개개인에게 보편적 성찰의 계기를 주어야 철학자일 거예요.

 

 

한나 아렌트는 그래서 철학자라 할 수 있어요.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의 문제를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 사이의 문제로 숙고하고, 나아가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의 반목이 아니라 유대나 연대를 통해 자본과 맞서야 해요. 이것이 제 근본적인 입장이에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구조적으로 분할해 노동 계급을 무력화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는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를 분할하려고 하죠. 잊지 말아야 해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갈등과 반목이 커질수록 노동과 자본 사이의 더 근본적인 대립 관계가 은폐되죠. 마찬가지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젠더 갈들이 심해지면 노동과 자본사이의 첨예한 대립 관계가 희석돼요. 어느 경우는 자본계급은 ‘자기들끼리 싸우네’하면서 미소를 짓겠죠.

 

벤담적 여성이 ‘차별’을 이야기하고, 벤담적 남성이 ‘역차별’을 이야기해요. 여기서 명령하는 자와 명령을 듣는 자로 구분되는 억압구조, 억압 구조를 경쟁에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라는 구분으로 정당화하고 내면화하려는 경쟁 논리는 어떤 도전도 받지 않아요. 억압구조와 경쟁 논리를 극복해야 돼요. 개개인의 인간을 우열과 열등으로 분류하는 오래된 국가의 매커니즘을 해체하고, 우열과 열등은 누구 탓할 것 없이 타인과의 치열한 경쟁으로, 그러니까 개개인의 노력으로 결정된다는 자본주의적 유혹을 거부해야 하니까요. 철학자로서 제 바람은 단순해요.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는 주장이 ‘여성은 우월하다’는 주장으로 비화되지 않는 거예요.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페미니즘 내부에 스며든 벤담적 자아를 도려내야 하죠.

 

페미니즘은 국가나 자본의 이간책을 경계해야 돼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페미니즘을 배웠더니 사랑을 더 잘하게 됐다고 하면 좋아요. 페미니즘은 인문주의와 민주주의 혹은 연대와 사랑의 원리가 될 수 있어요. 20대 남성들의 눈에는 더 이상 여성이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인 것 같아요. 저임금, 고용 불안, 일자리 부족이 심화된 상태에서 경쟁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일자리를 정책적으로 보장하는 여성 쿼터제 등이 시행되면서, 그만큼 남성 일자리는 줄어들게 돼요. ‘역차별’ ‘불공정한 경쟁’이니 하는 얘기가 나오는 계기죠.

 

젊은 남성들은 자신을 포함한 젊은 여성들마저 생계와 생존의 위험에 빠뜨린 주범을 잊고 있어요. 그건 동료 여성이 아니라 자본과 국가 탓이죠 원인을 잘못 진단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어려워요. 오히려 젊은 남성들이 ‘일반 여성’과 ‘페미니즘’과 싸우는 순간, 자본과 국가는 더 용이하게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할 거예요. 경쟁을 강화시킨 자본과 국가를 방치하고, 함께 검투사가 되어버린 젊은 여성들을 적대시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죠. 그래도 희망은 있어요. 사랑이죠. ‘여성 일반’이 아니라 ‘단독적인 여성’이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사람.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는 증거죠. 다행스럽게도 젠더 갈등이 아무리 심해져도 남녀 간의 사랑은 우열의 가치 평가를 넘어서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어요. 바로 여기에 희망이 있어요. 사랑과 연대가 국가나 자본이 강요하는 우열의 감각, 경쟁과 적대의 매커니즘을 붕괴시킬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겠죠.

 


 

한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다양한 술어가 있잖아요. 직장인이다, 어디 출신이다, 뭐를 좋아한다, 취미는 뭐다, 그리고 여성이다 등 여러 가지를 붙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다른 속성을 보지 않고 여성이라는 속성만 보게 된다면 파시즘적 사유가 작동한다고 볼 수 있어요. 인문주의자 혹은 민주주의자, 그것도 별거 아니에요. 어떤 사람의 수많은 속성을 동등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인문주의자고 민주주의자니까요. 물론 어느 경우에는 하나의 속성만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차별과 배제, 혹은 우열의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돼요. 오히려 하나의 속성만이 문제가 되는 경우, 그것은 애정과 환대 혹은 긍정의 계기로만 언급되어야 해요. 혹은 어떤 개체가 겪는 고통이나 갈등과 연대하려는 마음으로 언급될 수도 있어요. ‘저분은 환자야.’ ‘할아버지가 걷기 좋게 보도를 정비해야해’, ‘저 사람은 청년 노동자!’등등 바로 이 점이 중요하죠.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개인이니 하나의 속성만 부각될 때도 있지만, 이때 다른 속성들도 그 개인이 가지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요. 달리 말해서 개인이 가진 속성 하나가 그가 가진 수많은 속성을 은폐하거나 부정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개인을 여성으로만 보는 페미니즘과, 어떤 개인은 여성이지만 다른 속성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 페미니즘은 다른 거예요. 전자가 파시즘적 페미니즘이라면 후자는 인문주의적 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죠.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임금을 낮추는 것이 최상의 과제예요. 그래서 이주 노동자든 여성 노동자든 남성 노동자든 상관이 없죠. 공정을 둘러싸고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가 싸우든, 아니면 백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와 싸우든, ‘잘들 놀고 있네’이러는 거죠. 이 도식을 지금 우리 사회에 적용해도 똑같아요. 남녀의 다툼이든, 세대 간의 다툼이든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래서 보부아르가 노동과 자본 문제, 남녀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라고 했을 때, 저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는 거죠. 중요한 것은 젠더 문제가 여성이 가정을 떠나 노동자가 되면서 본격화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 노동자가 되면서 이제 ‘제 2의 성’굴레를 벗어던지려고 해요. 그래서 자본주의사회가 과거보다 뭔가 더 자유로운 사회처럼 보이죠. 그러나 생산의 자유는 없고 소비의 자유만 있을 뿐이에요. 채용의 자유는 없고 원서를 낼 자유만 있을 뿐이요. 자발적 노예, 출퇴근의 노예의 자유죠.

 

스포츠라는 것은 일단 노동계급 자체의 교육장이기도 해요.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고액 연봉을 받는다. 이런 논리를 연습시키는 거예요. 시장의 논리가 정확하게 반영된 것이 프로 스포츠고요. 그걸 소비하고 즐기면서 노동계급 스스로 경쟁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거죠. 경쟁에서 승리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하는 논리를 받아들이면, 내가 돈을 적게 버는 것은 경쟁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개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돼요. 노동자이면서 소비자인 사람들한테 제공되는 교육의 장이 두 개의 공간으로 대표될 거예요. 하나는 마켓, 소비를 하는 곳으로 돈의 우월함을 배우는 장이에요. 다른 하나는 경기장, 경쟁의 논리를 교육하는 장소예요.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어떤 선수는 천문학적인 연봉과 이적료로 명문 클럽으로 이적하기도 해요. 그 사이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인 거죠. 반대로 어떤 선수는 구단에서 능력이 없다고 쫓겨나기도 해요. 정리해고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죠. 이러한 억압체계가 경쟁의 콜로세움을 만들어 놓고 빠져나간 형국이에요. 억압체제는 말해요. 참여하기 싫으면 경쟁에 참여하지 말라고요. 그건 너의 자유라고.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전대미문의 간교함이죠.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노동력을 팔지 안 팔지는 너희들의 자유라고 궤변을 늘어놓으니까요.

 

스포츠, 특히 축구나 야구와 같은 프로 스포츠는 두 가지 목적에 종사해요. 하나는 노동계급이 프로 스포츠 관람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남루한 현실을 잊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경쟁 논리를 노동계급의 내면에 자연스럽게 각인시키는 거죠. 문제는 스포츠 산업도 자본과 노동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 있어요.

 

 

노예제와 노동 자체는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인류가 진보했다고 하는데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얼마나 많은 생태가 파괴되었고, 멸종한 종이 얼마나 많은데요. 다른 종 뿐만아니라 우리 자신도 파괴됐고요. 자본주의는 전대미문의, 우리 인간이 만든 간교한 지배체제나 억압체제라고 보여져요. 진보도 아니고 뭣도 아닌데, 우리가 너무 그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요.

 

억압의 공식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제가 봤을 때는 좋은 철학자들이고,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쁜 철학자들인 거예요. 나쁜 철학자들은 체제에서 싫어하지 않죠. 연구비를 누구한테 대주겠어요. 플라톤을 연구하는 사람한테 주로 주겠죠. 반면 좋은 철학자들은 왜곡하거나 은폐시키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걸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아요. 양적으로도 그렇고.

 

민주주의는 역사상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니까요. 폴리스밖에 없었어요. <역사철학·정치철학>은 민주주의에 대한 책이에요. 고대 이집트 시대와 지금의 자본주의 시대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요. 제 의식 속에서는 진보라고 여기지 않아요. 지배의 양식이 타율적 복종을 강요하는 형식에서 자율적 복종을 강요하는 형식으로 심화되었으니, 진보는커녕 진보의 희망마저 사라진 모양새니까요. 마르크스가 밝혔던 것이 그거예요. 먼저 ‘벌거벗은 노동자’로, 물적 생산수단을 없애서 자기 노동력밖에 없는 사람들을 만들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물질적인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자본재를 가지고 있고, 공장을 가지고 있고, 회사를 가지고 있고,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한테 ‘나를 고용해주세요’하고 자기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을 뿐이라고요.

 

거대 문명이 탄생한 기원전 3000년 이래로 지금까지 인류는 복종의 시대에서 5000~6000년 정도를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분업 체제에 진입을 해서 이 사회 시스템을 벗어나서는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분업의 강도가 세졌어요. 산업화된 시스템에서 하나의 나사가 되지 않으면 생계의 위험에 빠지는 사회인 거예요. 타율적 복종에서 자발적 복종으로 바뀐 것일 뿐인데, 체제는 ‘타율’과 ‘자율’만 강조해서 자본주의사회가 왕조시대보다 더 발달했다고 얘기를 해요.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복종’에 방점을 찍어야 돼요. 노동자들을 정확하게 ‘출퇴근 노예’라고 부르잖아요. 그러면 노예는 이렇게 정의 내리면 되죠. ‘출퇴근이 불가능한 노동자.’

 

 

강자에게 복종하지 말고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다

약자를 돌보는 것이 자유인의 자긍심이고

당당한 사람의 자긍심이라고 나는 말했어요.

 

 

벤야민의 가장 중요한 논문을 들자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예요. 거기 유명한 ‘아우라’얘기가 나오잖아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는 아우라가 있지만, 티셔츠에 복제되거나, 영화로 복제가 되거나, 머그컵에 복제되면 아우라가 사라진다는 거죠. 핵심은 영화이야기예요. 벤야민에 입장이 영화는 노동계급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영화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노동계급이라는 자각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매체라는 주장이에요. 이것을 비판한 아도르노는 부르주아 사회와 소비문화에 모든 것이 노동계급이기 때문에 깨어 있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노동계급을 계속 깨우쳐야 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입장이었어요. 엘리트 주의자였던 거죠. 벤야민은 영화를 통해서 노동계급이 스스로 리딩을 할 수 있다고 보았어요. 모세가 필요없는. 벤야민을 악용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이유는 굉장히 많아요.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벤야민의 미완의 대저인데, 이 연구 모음집에는 엘리트주의에서 노동자주의로 가는 벤야민의 면모가 담겨 있다는 점이죠. 아도르노는 이 방대한 유고를 엘리트주의나 비판적 평론가의 입장으로 박제하려고 하죠. 당연히 벤야민 사유의 최종적 귀결이자 응결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철학 테제>는 경시될 수밖에 없어요.

 

가장 명료하게 노동자 중심주의, 노동계급 중심주의, 그리고 땅을 회수당한, 더 이상 소작농이 아닌 소작농들의 사유, 그런 것들이 피력된 유일한 글이 <역사철학 테제>예요. 이 글을 쓰지 않았다면 벤야민은 정리가 안 된 철학자였을 뿐이에요.

 

저는 제가 서 있는 자리를 당당하게 밝혔어요. 특히나 중요한 것은 정당코뮌주의를 파리코뮌의 평의회코뮌주의로부터 완전히 도려내는 단호함이죠. 정당코뮌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회민주주의로 변주되고, 북한이나 중국 등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회주의로 변주되니까요. 정당코뮌주의는 진보팔이, 노동계급팔이, 민주주의 팔이의 뿌리예요. 저는 파리코뮌과 집강소에 서 있는 철학자예요. 엥겔스와 같이 있던 마르크스가 아니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스파르타쿠스 동맹 옆에 있고자 해요. 카스트로가 아니라 체게바라의 손을 잡고 있어요. 레닌과 트로츠키와 술을 마시기보다 크론시타트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 있으려 해요. 생산수단, 정치수단, 혹은 폭력수단은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 노동계급의 손에 쥐어져야죠. 평의회코뮌주의, 인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는 바로 그런 것이니까요.

 

 


 

제 소망은 제가 죽고 나서도 『역사 철학·정치철학』을 통해 자본 주의와 억압이 유지되는 한 누군가가 ‘강신주가 있어서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됐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명령을 강요하는 사람한테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리고 언제든지 자기 생각을 당당히 피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가 같이 명령을 내릴거야, 그리고 우리가 내리는 명령은 우리가 들을 것이고, 이 명령은 우리가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수정할 거야. 그런 민주주의자가 있다면 좋겠어요. 처음에도 얘기했잖아요. 자유인은 강하다고. 자유인은 강자에게 복종하지 않고, 약자를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진정한 자유인은 그 사람이 약하다고 해서 내 맘대로 끌고 가지 않고, 그 사람이 강하다고 해서 끌려가지도 않아요. 강한 사람한테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렇게 반문할 수 있는 사람, 약한 사람한테는 ‘말해봐, 말해봐, 괜찮아.’라고 얘기하는 사람, ‘말이 없는 것을 보니까 내 말을 따르나봐’라고 속단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자유인이죠.

 

 

철학자로 글을 쓰면서 <역사철학·정치철학>을 쓰든 <철학 VS 철학>을 쓰든 자유에 대해 썼어요. 강자에게 복종하지 말고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다, 약자를 돌보는 것이 자유인의 자긍심이고 당당한 사람의 자긍심이라고 나는 말했어요. 어떤 강자라고 해도 그 사람이 힘이 세고 나를 억압한다고 하더라도 강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아야 자유인이라고 배웠으니까요. 당당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고, 최제우가 말했던 하늘처럼 존귀한 님들의 공동체고,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들이 살고 있는 땅, 불국토(佛國土) 예요. 원효가 꿈꿨던 불국토. 누가 자유인의 목을 눌러요. 나를 죽이지 않는 이상 누구도 내 몸에 걸터 앉을 수 없어요. 강자한테는 사자 같은 사람이어야 해요. 그것이 자유인의 전통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 글을 쓰고, 자기 얘기를 쓰는 거죠. 권력이나 자본에 꺾여서 글을 쓰고 책을 내면 뭐 해요.

 


 

국어의 키에서 준비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핵심 요약 5부

흥미로우셨나요?

 

그럼 저희는

다음 포스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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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의 키 원장님께서 직접

강신주, 지승호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핵심 요약을 준비했습니다!

네번째 요약본 !!

지금 바로 만나보실까요 ?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저자강신주,지승호출판EBS한국교육방송공사발매2022.03.05.

[강신주 / 지승호] 강신주, 지승호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핵심 요약 (3)

▲ 세번째 요약본 ▲


 

☆ 이윤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아닌 좋은 책의 핵심을 요약한 책의 다른 시선입니다 ☆


여덟 번째 만남, 구경꾼에서 주체로

 

최악은 세상이 막연히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두 번째는 절망하는 거고,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분노하고 바꿔버리는 거예요. 내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더럽게 똥을 싸질러 놓았는데, 아무도 내 앞에 있는 똥을 치워주지 않아요. 스스로 치워야 돼요.

세월호 그리고 신자유주의

 

어떤 사람이 죽으면, 특히 비명횡사를 하는 경우, 왜 죽었는지를 고인이나 유족들은 알아야 해요. 그래야 관 뚜껑을 닫고 고인의 명복을 빌 수 있으니가요. 귀신이 돼서 구천을 떠돈다는 말은 억울함이나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아이들한테 이야기 해줘야 해요. ‘자본을 위해서 국가가 그 법을 통과시켰고, 그 법 때문에 죽었다’고요. 그게 가장 본질적인 원인이에요. 애초에 세월호라는 배가 운항할 수 없었어야죠. 세월호로 상징되는 자본이 이득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를 허락하는 이상, 누구나 세월호 참사의 당사자가 될 수 있어요.

 

자본은 이윤을 위해서 인간의 생계뿐만 아니라 삶 자체도 위기에 노출 시킬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이 자본주의를 통제해야하고, 그렇게 자본주의 시스템을 붕괴시킬 수 있어요. 다국적기업에게 노동자의 권익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든 어느 나라에서든 값싼 임금을 주고 물건을 만드는 게 목적인데요. 그런데 갑자기 이들이 환경을 얘기하고 사회를 얘기하고 지배구조를 얘기하니까 당혹스럽죠. 그런 가치를 추구한다면 외국인 노동자 데려다가 값싼 임금으로 착취하지 말고, 가난한 나라에 공장 세워서 환경 오염시키지 말고, 노동자들에게 지배권을 넘겨야죠.

 

 

세상이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희망도 버려야 해요.

또 세상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비관도 버려야 하고요.

 

 

아이가 유괴를 당한 부모들은 이사를 가지 못해요.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죽음은 아마 실종일 거예요. 실종은 죽음이 아니예요.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잖아요. 내 아이가 여행을 갔는데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사를 갈 수 없죠.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면, 잘 모르겠는 사람들은 이렇게 애기할 수 있어요. 그래도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돌아올 희망이라도 있는 것 아니냐고. 잔인한 얘기얘요. 왜냐하면 그 상태에서 떠나지 못하고 멈추게 돼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실종이 남겨진 사람에게 더 큰 아픔이자 상청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죠. 진실을 확인하고 시신을 발견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한 거예요. 세월호 소중한 아이들의 죽음에 원인은 신자유주의적 입법에 따른 규제 완화 정책이라고 사망 원인이 적혀 있어야 해요. 세상을 떠난 사람을 위해서도 그리고 남겨진 사람을 위해서라도 죽음의 이유는 분명해야 돼요.

 

 

 

명령을 듣던 사람이 명령하는 자리에 들어올 때, 그래서

스스로 명령을 하고 스스로 명령을 듣는

정치적 ‘주체=객체’가 될 때, 민주주의는 가능하죠.

 

 

촛불집회도 새로운 왕조에게 기회를 주었던 농민봉기처럼 소비된 거예요. 한 때 전국적으로 200만명, 광화문에는 150만명이 모여들었어요. 이 정도 인원이 모였음에도 촛불집회는 ‘합법적인 평화 집회’를 지향했어요. ‘합법’은 혁명이 될 수 없죠. 자본주의를 비호하는 것이 바로 우리 법률인데, 이 법률에 부합하겠다는 이야기니까요. 이후 헌법재판소는 탄핵결정을 해요. 헌법재판소는 어쩔수가 없었어요. 부르주아 법률의 최고의 보루니까. 유신독재 시절에도 존재했고 부르주아 법률에 근거해서 아직도 일하고 있는 조직이 사법부예요. 잘못하면 대의제나 자본주의 체제가, 나아가 사법 체계가 붕괴될 수 있어요.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 결정을 지켜보면서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일이 잘됐구나.’하고 안심을 한 거죠.

 

박근혜의 탄핵! 그 대가로 부르주아 체제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어요. 모든 지배 형식이 그대로 유지됐으니까요. 청와대의 주인들이 바뀔뿐이죠. 다시 ‘명령하는 자와 명령을 듣는 자’라는 억압적 형식이 기능을 하게 된 거예요. 다시 우리는 정치의 객체로, 명령을 듣는 자의 자리로 돌아왔죠.

 

회사나 공장에서 자본의 명령을 듣고, 행정부의 명령이나 국회의 입법을 투덜대며 따르는 익숙한 자리로 다시 돌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촛불 집회 이후 아무것도 바뀐게 없다고 느껴지는 거죠. 전 세계 부르주아 국가들이 한국의 촛불집회에 환호를 보낸것도 이런이유에서예요. ‘합법적 평화 집회’였으니까요. ‘합법’은 부르주아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평화’는 권력을 잡은 소수나 자본을 독점한 소수에 대해 직접적인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단재 신채호는 의열단에 참여해서 일제의 폭압에 맞서 폭탄도 만들고 직접 위조지폐도 만들었어요. 폭탄을 만들거나 위조지폐를 제조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다는 것은 억압체제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평화 집회’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통찰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예요. 억압체제에 쫄게 되면, 피억압자들의 운동은 ‘합버’과 ‘평화’라는 말을 떠들죠. 결국 합법적 평화운동은 이미 지고 들어가는 서글픈 운동일 뿐이예요.

 

 

신채호는 구시대의 혁명을 부정해요.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는데, “구시대의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상전’의 교체가 아니라 ‘상전’이 없어지는 것, 개인의 자유와 정의로운 공동체를 스스로 주인이 돼서 만드는 것이 혁명이라는 얘기예요. 신채호가 간디보다 수천 배 위대한 이유죠. 결국 신채호의 시선에서 촛불집회는 혁명일 수 없어요. 여전히 수많은 상전의 형식을 털끝하나 상하지 않은 채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상전인 회사의 CEO가 있고, 자본가가 있고, 국가는 명령을 내리고 있고, 입법으로 그것을 강제하고 있잖아요.

 

억압체제, 혹은 억압의 형식 자체를 응시했던 사람들과 연대하고

앞으로 태어날 자유인들을 기다리는 책을 쓰고 싶었어요.

 

 

마르크스, 최재우, 신채호, 로자 룩셈부르크, 기 드보르, 체 게바라, 카스토리아디스, 랑시에르, 같은 걸출한 자유인들뿐만 아니라, 1871년 파리코뮌의 전사들, 1894년 집강소를 지키며 산화했던 우리 농민들, 1918년 독일혁명의 전사들, 1921 레닌과 트로츠키와 맞섰던 크론시타트 수병들과 시민들, 1960년대 초반 체 게바라와 함께 했던 전사들, 1968년 68혁명에 참여했던 자유인들, 그리고 그 이후 세계 도처에서 억압체제에 맞서 싸웠던 익명의 동지들까지……. 새로운 상전들의 거짓 혁명 놀이에 은폐된 진정한 혁명을, 새로운 상전들로부터 배신당한 혁명을, 그 혁명의 진정한 자유정신과, 그 혁명의 뜨거운 인류애와, 그 혁명의 성스러운 자기 희생을 기억해야 하니까요. 앞으로 태어날 자유인들을 위한 든든한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국어의 키에서 준비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핵심 요약 4부

흥미로우셨나요?

 

저희는 5부 내용을 담은

다음 포스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


리딩플러스독서논술국어의키교습소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로8길 8-1 201호 리딩플러스 국어의 키

 

 

안녕하세요!

최강의 성동구 논술! 국어의 키​ ​입니다 :)

 

 

국어의 키 원장님께서 직접

스콧 애덤스 작가의 「THE SYSTEM」

핵심 요약을 준비했습니다!

지금 바로 만나보실까요 ?

더 시스템(The System)저자스콧 애덤스출판베리북발매2020.07.17.

☆ 이윤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아닌 좋은 책의 핵심을 요약한 책의 다른 시선입니다 ☆



들어가며 ...

당신만의 성공 공식을 찾아라

 

 

이 책은 실패를 밥 먹듯 하면서도 결국 성공을 거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쓸만한 아이디어를 얻기 바란다. 나는 성공을 위해서 행운이 나를 쉽게 찾아내도록 하는 전략을 세우고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조언하는 책이 아니다.

 

- 목표는 패배자들을 위한 것이다.

- 당신의 뇌에 마법을 걸려고 하지 마라. 뇌는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말랑말랑한 로봇이다.

- 성공으로 향하는 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에너지다.

- 기술을 하나씩 습득할 때마다 성공 가능성은 두 배가 된다.

- 건강에 자유를 더하면 행복이다.

- 행운도 일종의 관리가 가능하다.

- 연기를 해서라도 수줍음을 정복하라.

- 신체를 단련해야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 단순화는 평범함을 놀라움으로 변모시킨다.

 

이 책이 도움이 되는지 판단하기 전에, 당신에게는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진실과 허구를 가려내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거름망을 지닌 사람이 대부분이다. 복잡한 문제를 대할 때는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유한한 존재인 웅리 인간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며 항해해야 한다. 그리고 행복과 성공을 추구하는 과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Part 1. 실패를 인정하고 뽑아먹어라

 

실패는 당신의 친구라는 점을 늘 기억하라.

실패가 원석이라면 성공은 다이아몬드이다.

 

나는 실패를 불러들인다. 실패를 견뎌 낸다. 실패가 지닌 가치를 인정한다. 그리고 나서 실패에서 배울 점을 뽑아먹는다. 실패에서 중요한 가치를 추출해낸다. 나는 실패를 경험한 덕분에 만화가로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열정적인 사랑은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큰 위험을 감수할 가능성이 높다. 성공을 거둔 사람은 책도 쓰고 매일 자신의 성공 비법을 알리기도 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한다. 열정이 성공을 불러왔다기 보다는 성공이 열정을 불러왔던 것이다. 에너지는 좋은 것이지만 때로 열정은 상황이 좋을 때만 느끼는 헛소리일 수 있다.

 

나는 주위의 누구보다 많은 실패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성공이 실패 속에 떡하니 숨어 있길 좋아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인생에서 원하는 모든 것이 실패라는 커다란 통에 들어 있다. 거기서 어떻게 좋은 것을 골라내느냐가 문제다. 아이디어가 이 세상에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아이디어만으로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디어가 실행되어야 보상이 돌아온다.

 

실패를 불러들여라. 실패를 견뎌라.

실패의 가칠을 인정하라.

실패에서 배울 점을 뽑아 먹어라.

 

패배자는 목표를 설계하고 승자는 시스템을 만든다. 나사 만드는 CEO를 통해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전부가 아니며 더 나은 일을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목표가 아니아 시스템을 지녀야 한다는 말을 들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목표 달성을 위해 시스템을 활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목표 지향적인 사람은 시도할 때마다 좌절감과 싸워야 한다. 시스템 지향적인 사람은 자신의 시스템을 적용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개인의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시스템과 목표에는 큰 차이가 있다.

 

'20kg 감량'은 목표지만, '올바른 식습관'은 시스템이다.

'4시간 이내 마라톤 완주'는 목표지만, '매일 운동하기'는 시스템이다.

 

당신이 아닌 시스템 모델은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다. 당신이 장기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무언가를 매일 꼬박꼬박 하는 것은 시스템이다. 반면에 특정한 어느 시기에 무언가를 달성하고자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목표다. 시스템은 열정을 압도적으로 능가한다.

 

나의 경쟁력은 창의력이었다. 나는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까지 시도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다가 대중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까지 시도할 여지가 있었다. 나는 길게 보고, 행운이 나를 찾아오도록 환경을 만들려고 했다. 계략적이라도 어느 정도 전략을 세우고 집중할 범위를 정하면 큰 도움이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있기 째문에 자신이 버려야 할 것과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을 신속하게 걸러내야 한다. 다만, 어떤 계획을 세우든 당신은 '집중'이라는 단어를 늘 기억해야 한다.

 

대중이 원하는 걸 새로이 만들어내고 대량 생산하기 위한 나의 시스템 앞에는 수많은 실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산이 없는 게임처럼 보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시스템이 아니라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몇 번의 실패를 맛 본 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느낌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시스템을 고수하면서, 나는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날마다 내 능력이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국어의 키에서 준비한

「THE SYSTEM」 핵심 요약

흥미로우셨나요?

 

저희는 더욱 흥미로운 주제와 함께

다음 포스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

 

신고 성동광진 441호 리딩플러스국어의키 국어 16만원~ 중등 15만원 고등 23만원

리딩플러스독서논술국어의키교습소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로8길 8-1 201호 리딩플러스 국어의 키

 

 

 

 

안녕하세요!

최강의 성동구 논술! 국어의 키​ ​입니다 :)

 

국어의 키 원장님께서 직접

신영준, 주언규 작가의 「인생은 실전이다」

핵심 요약을 준비했습니다!

지금 바로 만나보실까요 ?

인생은 실전이다저자주언규,신영준출판상상스퀘어발매2021.09.08.

 


 

 

☆ 이윤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아닌 좋은 책의 핵심을 요약한 책의 다른 시선입니다 ☆

 

 



존중 없는 관계는 없다

존중의 사전적 의미는 ‘높이어 귀중하게 대함’이다.

 

기본적으로 어떤 관계도 존중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존중의 시작은 사전적 정의에 따라 상대를 높이는 것이다. 이는 나를 낮춤으로써 이룰 수 있다. 도한, 진정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을 함께 공감해주고 인정해주는 것이 그 사람을 귀중하게 대한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존감을 지키는 것을 본능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무시하는 태도만 보이지 않아도 적정선의 존중을 보여줄 수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그렇다. 습관이 중요하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습관은 그 어떤 습관보다 우리 인생에서 가치가 높다. 습관은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다.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존중 없는 관계는 없다.”

 


 

가짜 행복에 속고 있는 우리들

 

 

많은 사람이 가짜 행복에 속고 있다.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소셜 미디어

매트릭스라고 할 수 있고 가짜 공간이고 가짜 행복에 조정당할 수 있다.

 

2. 가짜 인간관계

내면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아와 먼저 연결되어야 하고 자신에 대한 이해부터 높여야 한다. 그것이 진짜 인간관계의 시작이다.

 

3. 급조한 꿈

진정한 꿈이 있는 사람은 과정이 행복하다. 하지만 드믈다. 급조한 꿈을 진짜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젊어서 고생은 절대 하지 말아라

 

절대 생고생을 돈 주고 사서 할 필요는 없다.

최저 시급이라도 받지 않으면 고생은 피하자.

 

“당신이 젊다고 생각하면 버는 돈의 액수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라. 능력치를 올리는 것이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능력만 있으면 큰 돈을 벌 기회는 나중에 많이 있다.”

 

제대로 버는 것의 중요성이다.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돈 버는 일을 선택할 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거나 보수가 압도적으로 크지 않다면 일을 통해 어떤 능력치를 쌓을 수 있는지를 더 높은 우선순위로 정하기 바란다.

젊어서 고생은 절대 하면 안 된다.

 

 

 

퇴근 후 진짜 인생을 사는 법

1. 무조건 체력이 중요하다.

2. 부업

돈은 강력한 동기가 된다.

3. 덕질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절대 쉽게 돈을 벌 수 없는 이유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은 무엇일까?

 

바로 내가 하는 일이다. 노력만으로 큰 부를 얻는 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결국은 내 노력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얼마나 부가가치가 크게 발생하는지가 중요하다. 운도 빠르게 시도한 사람이 더 많은 운을 쟁취한다. 다른 사람이 돈을 쉽게 번 것 같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결과만 본 것이다. 대부분 타인의 능력을 판단할 때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 따지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결국 정보는 내 능력만큼 얻을 수 있다. 쉽게 돈을 버는 비밀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능력을 키우면 된다.

 

피카소가 프랑스 카페에서 넵킨에다 그림을 그리고 50만프랑이라고 얘기하고 어떤 행인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넵킨의 그림을 그리기까지 피카소는 40년이 걸렸다고 얘기한다. 물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만 본다. 하지만 물 아래에는 오랜 세월 길러온 능력, 리스크를 감수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통제 불가능한 운까지 존재한다. 이 정도면 쉽게 돈을 버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감이 올 것이다.

 

 

 

평생 재수 없게 사는 사람들의 3 가지 특징

 

1. 무엇이 중요한지 모른다.

우리 인생에는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일이 반드시 있다. 또 상대적으로 중요한 일이 공통 분모에 해당하는 것이 있고 실천을 해야 한다.

 

2. 돈 아까운 줄은 알고, 시간 아까운 줄은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시간이다.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시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3. 실수를 반복한다.

인생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핵심은 “얼마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가?”라고 정의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한 공부란 무엇인가

 

진정한 공부란 무엇인가

 

올바른 학습 방법을 익히고 실천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바로 ‘용기’이다. 공부의 정의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다. ‘배움’에서 익힉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에 ‘용기’가 있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용기’이다. 용기를 가지고 반복하여 경험을 싸으면 올바른 익힘(습(習))을 하게 된다. 무조건적인 노력은 정답이 아니다. 의식적인 노력이 축적이되어야 최고를 향해 성장할 수 있다.

 

책을 한 번만 읽고서 그 내용이 온전하게 소화되리라 생각하는가? 착각이다. 배움과 익힘이 조화를 이루어 한 분야의 장인(공(工))이 되려면 공부에서 익힘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명심하고 개선해야 한다.



국어의 키에서 준비한

「인생은 실전이다」 핵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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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포스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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