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강의 성동구 논술! 국어의 키 입니다 :)

 

오늘은 '엄마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리터러시' 라는

주제로 책 이야기를 색다르게 접근해보려 합니다.

 

단순하게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에서 벗어나

책 내용을 바탕으로 부모님이 아이에게 전할 수 있는 것들을

저희 국어의 키에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리터러시

 

서른번째 주제는 바로바로~!~!

"남몰래 하는 사랑(선행) 그리고 자본주의" 입니다.

 「의좋은 형제」를

바탕으로 한 리터러시 글!!

지금 바로 만나보실까요?

 
동화는 정답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 아이에게 생각을 그리게 하고,
통찰을 배우고, 익히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나눔의 아름다움

 우애가 좋던 형과 아우가 있었는데, 이 형제 모두 각자가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 부모님의 유산을 정확하게 나누어 분배를 하였습니다. 형은 결혼하여 자녀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우는 아직 총각이었습니다.

이들 형제는 얼마나 우애가 좋았던지 평소 새로운 음식이 한 개라도 생기면 반드시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지 않으면 먹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후에도 아침에는 형이 동생의 집에 들렀고 저녁에는 동생이 형의 집에 들러 한 상에서 같이 음식을 먹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가을날 추수를 끝내고 곡식을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었습니다. 동생은 형이 자기보다 식구가 많다는 이유로 형은 동생을 챙겨주기 위해 형제는 각자의 볏단을 서로에게 주기 위해 밤마다 자신의 논에 쌓아 놓았던 볏단을 서로 몰래 상대집 볏단에 쌓아놓았습니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큰 차이가 없어 의하하게 여겼습니다. 둘 다 똑같이 행동한 나머지 볏단은 크게 줄지도 늘지도 않았던 일이 신기했습니다.

이에 이상하게 생각하던 형제가 결국 어둑해진 다음날 밤에 서로 볏단을 들고 가다가 길에서 마주쳐 진실을 알게 되면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입니다. 

 

 

까칠하게 형제를 바라보기

1. 밤마다 그게 무슨 짓인가요? 뻘짓이 아닌가요? 미리 얘기하고 나누면 그런 일이 없잖아요?
  맞긴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겉으로는 정확하게 절반 씩 나누고 몰래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선행이 아니라 은근히 상대방이 부담이 덜 가도록 배려한다는 것이 칭찬할만합니다. 또한 자기보다 타인을 우선했다는 것입니다. 내 이익이 우선이 아니라 타인의 상황을 먼저 헤아리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베풀었다는 점이 좋습니다. 현대인에게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2. 가족만 위한 것이 아닐까요? 마을이나 더 큰 공동체에 이바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책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실존인물이라) 성정으로 보았을 때 그리고 왕(세종 2년 효자정려)까지 기리는 것을 보면 선행과 덕을 많이 쌓아서 마을에도 좋은 일을 많이 하셨을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3. 며칠씩이나 밤에 볏단을 나르고 헛수고를 했는데

    그러한 원인을 먼저 살피고 해결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왜 볏단이 줄지 않았는지 물어보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면으로 살펴보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또한 상대방이 아마 더 필요할지 모른다는 이타심이 작용이 더 컸을 것이라는 짐작도 합니다. 볏단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탈곡을 하기 전 볏닷의 형태가 가장 들키지 않고 주기에 적단한 단계이지 않을까 합니다. 쌀로 변한 것으로 주고 받기에는 생색내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또는 하마 예상도 하지 않았을까요? 아마 내 형이(아우가) 나를 생각해서 이렇게 주었으니 내가 오늘 밤 더 주어서 마음 편히 있자라는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둘이서 밤에 지게를 진 서로의 모습을 보고 한참이나 웃을 수도 있고 얘기도 나누고 눈물까지 흘릴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자본주의 공동체 부수기 그리고 남은 가족이라는 형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자본화 과정을 문명화의 과정이나 자유의 과정이라 찬양해요. (중략) 그러나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반드시 자신을 팔아야만 하는 사회가 어떻게 자유로운 사회일 수 있겠어요. 이미 퇴로는 차단되어 있어요. 주위를 둘러봐도 전통적 공동체와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는 자본주의에 의해 거의 궤멸되었으니까요. 그 흔적이나마 남아 있는 공동체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에요. 이미 벤담적 개인주의에 적응된 우리는 혈연공동체마저도 불편하게 느끼니까요. 평소 자주 만나지 못한 친척들이 찾아오면, 우리는 무언가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으니 잘 재우고 잘 먹여야지’이런 생각보다는 ‘삼촌이나 고모는 언제 내려가지?’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거예요.
 (중략)

 ‘가족’은 자본주의가 파괴했던 공동체의 마지막 형태라고 할 수 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본주의가 파괴하지 않고 남겨둔 마지막 공동체라고 할 수 있죠. 가족이 미래의 노동자를 기르는 것이 자본주의 입장에서 더 효율적이었던거예요. 그래서 남겨둔거죠. 그러나 점점 가족마저도 와해되고 있어요. 가족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 벤담적 개인주의가 범람하니,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어떻게 이 흐름에 저항할 수 있겠어요.
(중략)
  자본주의 체제는 지금 막장으로 치닫고 있어요. 혈연에 뿌리를 둔 가장 원초적인 사랑의 공동체, 가족마저 와해시키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예수나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사랑하지 못해요. 그래도 최소한 가족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있잖아요. 그런데 자본의 논리는 이 최소한의 힘마저도 고갈시키고 있어요. 사회 안전망도 자본주의적 교환관계로 만들어요. 본질적인 해결이 아니죠. 그냥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중략)
  사랑은 당사자가 느끼고 실천해야 하는 일이죠. 사랑은 100퍼센트 자발적이어야 해요. 사랑은 강요가 되면 끔찍한 거예요. 아무리 자식들과 가족들을 잘 돌봐도 얼굴에 그늘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 며느리 같은 사람 없고, 우리 형님 같은 사람 없고, 우리 형수 같은 사람 없다’고 쉽게 말하지 마세요. 형님은, 그리고 형수는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잘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반강제적으로, 혹은 사회적 시선 때문에 애정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수도 있다는 얘깅에요. 반대로 스스로 ‘내가 이들을 돌봐야지’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들의 얼굴은 그렇지 않아요. 사랑은 자발적이어야 해요.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사람들의 얼굴은 밝기만 하죠. 사랑이 타율적으로 강요되면 끔찍한 범죄에요. 사랑과 자유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니까요.
사랑의 놀라운 점은, 사랑을 줄 사람한테 다 갚을 수 없다는 거예요. 갚으려해도 시도는 할 수 있는데, 갚아지지가 않아요.

 

 이야기로 돌아와서 형제가 밤에 서로의 볏단(사랑)을 보면서 얼마나 흐믓했을까요? 형은 아우를 위해 아우는 형을 위해 자기의 것을 나누는 모습이 참 든든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농경사회에서의 가족의 의미는 참으로 소중했습니다. 농경 시스템이 집단으로 노동을 필요해서 자연스럽게 생긴 문화라도 얘기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가졌던 공동체에는 누구하나 외면당하고 자살하고 일을 못한다고 해서 버려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마을의 바보는 그 공동체가 떠안고 더불어 사는 삶을 모색했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지 나 살기도 바쁜데 하면 개인주의가 중요시 되는 사회를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벤담적 개인주의로 조선 시대를 살았다고 하면 아마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외면을 받고 살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흥부와 의좋은 형

흥부는 흥부전의 주인공으로, 부친 사후 형 놀부에게 전재산을 모두 털리고 쫓겨나서 길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살다가 구렁이에게 공격받는 제비를 구해주고 다리를 치료한 보답으로 그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키워 그 박을 갈라보았더니 보물이 나와 부자가 된 인물입니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비판적인 시선도 있습니다. 부지런하지 않았고 가족에 대해 무책임했으며 무한정 낙관론으로 자기 몸하나 건사하지 못하다가 운 좋게 박씨로 인해 열심히 살지 않고 막살았는데 부자 운명으로 바뀌었다는 등의 설입니다. 수많은 연구물들을 통해 많은 흥부전의 연구로 놀부의 악행이 드러나기도 하고 흥부의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던 모습 (매품팔이)등에서도 나와 많은 오해가 없어지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의좋은 형제와 흥부전 모두 형제간의 우애를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가 좋은 형제가 나오는가 하면 처음에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 패가망신한 막장까지 간 놀부의 개과천선으로 인해 화해를 하는 흥부전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형제의 의가 더 단단해질 수 있는 것은 의좋은 형제보다는 놀부와 흥부의 형제의 의리가 더 단단해 질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진심으로 후회하는 것이 아닌 악어의 눈물이었다면 다른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겠지만 흥부가 재산이 더 많고 힘이 더 세대하고 하면 그 둘의 관계는 꽤 오래 긍정적으로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짜 마음이 바뀌고 형제가 의좋게 지내는 모습이기 바랍니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밥을 꼭 먹어야 한다.”는 것을 강요받지는 않습니다. 많은 얘기를 통해 중요하다고도 그리고 배울 점이라고도 하지 않죠. 그렇다면 형제간에 우애가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일까요? 조선시대에도 개인에 따라 다르지 않았을까 합니다. 오히려 남을 배려하고 형제간의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흔하지 않아서 세종 임금께서 상도 내리고 나중에 연산군 3년에 효제비가 다시 내리지는 않았을까요? 조선 시대에 살지 않아 사실을 밝힐 수는 없지만 그다지 흔한 일까지는 아니지 않을까 합니다.

 

 

 

“ 밥을 나눠주는 형제, 밥(빵)을 훔치다 감옥에서 19년을 보내는 장발장 ”

 장발장은 본래는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빵 살 돈조차 없는 나머지 누나와 7명의 조카를 먹일 빵을 구하려고 빵집에 침입해서 빵 몇 개를 훔쳤다가 징역 19년이라는 엄청난 형벌을 받았습니다.
  타인을 위한 행동이라는 본질은 같지만 그것을 위한 행위의 결과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납니다. 감옥에서의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사랑과 은혜를 받기까지 타인에 대한 원망과 증오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작은 시작이 돌일킬 수 없는 긴 세월동안 고통 속에 그리고 부정적 감정으로 하루하루를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삶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우울만하거나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가장 큰 계기는 미리엘 주교와 수양딸 코제트를 데리고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아무 죄 없는 수녀들이 죄인들을 위해 고행 기도에 몸 바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을 한 사건이었습니다. 장발장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더욱 굳게 가지고 악을 행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기에, 남을 해치려는 짓은 좀처럼 하지 않는 선인으로 거듭났던 거죠. 

 

 장발장은 당시 몽트뢰유의 주요 산업이었던 구슬 장식 사업을 크게 번창시켰습니다. 구슬 팔찌 끈 매듭 묶는 방식을 작업하기 쉽게 바꾸었고, 유리를 녹여서 색을 입히는 번거롭고 위험한 공정은 안료를 칠하는 것으로 바꾸는 혁신을 가져오는 사업 수완을 발휘합니다. 사업가로서 성공한 그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엄청난 돈을 사용했습니다. 앞서 얘기한 벤담적 개인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이타적 공동체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장발장은 죽기전 남은 돈조차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유언을 남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과론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 의좋은 형제의 좋은 모습과 장발장의 이타적 헌신의 삶과는 다소 무게감이 큰 차이가 납니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어디에 자기의 삶을 투영해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가르침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때로 망각하며 다 잡아 쥘수도 없는 것들을 손에 두려고 억지스런 삶을 하루 하루 살고 있지 않나 반성해 봅니다. 장발장이 죽을 때 남았던 돈 오백 프랑짜리 지폐 한 장도 우리는 삶을 마감할 때 가져가지도 못할텐데하고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이타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국어의 키에서 준비한

'엄마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리터러시'

서른번째 주제 "남몰래 하는 사랑(선행) 그리고 자본주의" / 책 「의좋은 형제」

흥미로우셨나요?

 

저희는 더욱 흥미롭고 유익한 주제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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