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강의 성동구 논술! 국어의 키 입니다 :)
국어의 키 원장님께서 직접
강신주, 지승호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핵심 요약을 준비했습니다!

지금 바로 만나보실까요 ?

※ 이윤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아닌 좋은 책의 핵심을 요약한 책의 다른 시선입니다 ※


우리 모두 조금만 더 가난해졌으면
강신주 선생님께 궁금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강신주 선생님의 답변을 통해 이 사회 현상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접근 할 수 있었습니다.
연상호 드라마 <지옥>을 보고서도 ‘저기 내 모습이 있다.’반성한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저 악마들과 똑같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지금은 피해자 서사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고 억울해합니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것처럼 혐오는 혐오를 낳는 것 같습니다. 혁명같은 것은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시대로 보입니다.
개인이 시장과 한 몸이 되고, 자본주의에 물든 이 사회에 강신주라는 혹은 해독제가 필요한 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은 “자본주의는 매번 새롭게 변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유일한 체제”이며, “자본주의의 전대미문성은 거기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자본주의는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고, 그 필수품이 또 필수품을 낳고, 그 필수품이 새로운 사치품을 만들고, 이 새로운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는 과정을 무한 반복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거기서 자연과 인간은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타자와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 소수 지배자가 되거나 그들 편을 들지 않고 지금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인문주의적 패밀 리가 많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 만남,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
인문학의 핵심 가치는 사랑과 자유를 지향하는 거예요. 자유를 포기하거나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거죠. 사랑과 자유는 결국 같은 거예요. 사랑과 자유가 왜 같은 것인지 사랑을 해보면 알아요.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자기가 자유로운지 아닌지를 아는 거죠.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꿈꾸는 것을 이루려 한다면 억압체제에 저항하게 돼요. 왜냐하면 체제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요. 사랑과 자유는 항상 같이 가는 거예요. 인문학의 정신이 사랑과 자유가 아니면 뭐겠어요. 그 두가지 내용을 가진 것이 인문주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예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은 기적이나 선물이지 당연한 대가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수많은 인연의 결과물이다
‘나’라는 사람은 독자적으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복잡한 ‘인연’관계로 생겨난 존재예요. 세상과 나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논의를 불교에서는 희론이라고 해요. 우리의 사유를 희롱해서 삶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논의라는 뜻이죠. 그래서 희론이 적멸해야 마음이 평안해지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거예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 벤담적 자아가 저한테 희론인 거예요. 자본주의는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 나쁘게 말하면 이기주의를 조장해요. 그러니까 자본주의적 인간은 ‘이기적 개인’이라고 말할 수 있죠. 문제는 이기적 개인은 사랑과 연대의 가치를 알 수 없다는 점이죠. 사랑과 연대는 자발적 자기 희생을 요구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배가 고프면, 우리는 자신의 배고픔을 견디며 자기 밥을 내주니까요. 분명 고통을 선택한 셈인데, 오히려 뿌듯한 마음이 들죠. 벤담이 숙고하지 못했던 사랑과 연대의 힘이죠.
우리는 사랑과 연대를 위해 자신의 불리함과 고통을 선택하는 존재였어요.
중용에도 불성무물이라는 말이 나와요. 성(誠)하지 않으면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인데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으면 어떤 사물도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성(誠)’한 담론을 ‘성(誠)’한 사유를 추구해야 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물질적 생산수단의 독점으로 잉여가치를 얻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사회가 억압적일 때 그 세계를 해석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그걸 정당화한다는 거예요.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것이 그런 거예요. 그건 해석일 뿐이라는 거죠. 해석을 할 필요가 없어요. 해석할 대상 자체가 부정의의 산물이면 제거를 해야지. 부르주아 사회는 정당화의 대상이 아니고, 치워야 하는 대상인 거예요.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회’, ‘사회적 인간’이라는 표현을 써요. 사람들은 쉽게 읽고 지나치는데, 굉장히 강한 뜻인 거예요. 인간의 사회는 특정 소수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다수가 스스로를 지배하는 사회라는 뜻이고, 사회적 인간이란 지배, 피지배가 없는 인간이라는 뜻이니까요.
부르주아 사회는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오히려 노예사회, 농노사회라는 것을 부각시켰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를 정직하게 노동자사회라고 부각시키지 않아요.
등불의 패밀리
강신주의 의견만이 아니고 로자의 의견이고, 파리코뮌 전사들의 절규였어요. 갑오농민전쟁때 동학 농민인 거예요. 인내천 사람이 하늘님이에요. ‘놈’이 아니라 ‘님’인 거죠. 노예로만 살면 노예려니 그러는 거죠. 그래서 신동엽 시인도 <누가 푸른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하고 묻는 거예요. 여기서 ‘푸른 하늘’은 인내천의 하늘이에요. 신동엽은 묻고 있는거예요. 왜 굴종을 하느냐, 왜 명령을 듣고 ‘상전’의 말을 듣느냐는 거예요. 너희들이 하늘이라고 말했던 것은 부르주아의 하늘이고, 기만적인 하늘이고, 자발적 복종의 하늘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도 그런 역사가 있단 말이에요. 우금치에서 죽어갔던 사람들도 우리 패밀리죠. 명령하는 소수가 있고, 명령을 듣는 다수가 있어요. 이것이 억압사회잖아요.
하늘을 누가 소유하는 공간이 아니에요. 공장이든 땅이든 마찬가지잖아요. 자기 자신을 위해하게 보지 않으면 돼요. 스스로를 배워야 되고, 세상에 대해서 평가 내리고 생각한 대로 떠들고 다니지 말아야 되고 자신이 항상 작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해요.
우르는 포털 사이트를 공유의 공간이라고 하잖아요. 정확하게는 상업의 공간이죠. 이득을 남기고 마케팅을 하는 공간이에요. 예를 들어 공유의 공간은 ‘위키디피아’밖에 없어요. 구글은 이용하는 사람들의 지닌 경향을 빅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착취하지만, 사람들한테 그 결실을 분배하지 않아요. 그래서 네이버라든가 카카오 같은 업체들이 거대해진 거예요.
저는 사람들이 누구를 지배하거나, 누구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거예요. 자유롭게 자기를 표현하고 타인의 얘기를 들을 수 있어야죠.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 그리고 타인과 합의를 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도 알아야 해요.
책만큼 강력한 게 어디 있겠어요?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가 얘기하고 싶은 것을 차분하게 다 풀어놓는 거예요. 더 얘기할 필요가 없죠. 그 사람이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책에서 알려주니까요.

두 번째 만남, 사람의 문맥을 읽는다는 것
사람들이 자기 세계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아요.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현실적으로, 객관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1000년 전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어떤 사유든지 간에, 자기가 자유롭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공(空)사상과 관련이 있어요. 자기가 성장한 만큼 관심이 바뀌면 다른 철학자로 옮겨갈 수 있어야 해요.
자기가 생각하는 것들, 하나의 문맥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다양한 문맥을 읽는 연습이 부족해서죠. 그러니까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있잖아요. 어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콘텍스트까지 이해하겠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모든 콘텍스트를 자기중심적으로 봐요. 그러다가 ‘내가 텍스트만 내 문맥 안에 집어 넣어서 읽었고, 그 사람은 문맥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 지혜로워지는 거죠. 처음에 시행착오를 겪어야 돼요.
시(詩)라는 장르가 있잖아요. 노골적으로 시인은 자신이 쓴 시에서 콘텍스트를 찾으라고 요구하죠. 콘텍스트를 녹여낸 글쓰기가 시예요. 시가 어려운 이유가 그거죠. 그 콘텍스트성을 찾지 못하면 아예 읽히지 않게 쓴 것이 시예요. 시 읽는 감수성이 인문학 중에서는 최고죠.
우리가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능력을 기르는 거예요. 문자로 쓰인 것만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책은 배우지 못한 어머니 아버지라는 책이고, 우리는 그걸 잘 읽어내야 해요. 잘 배웠다는 것은 표현을 잘한다는 뜻이에요.
인문(人文)이라는 말은 영어로 휴머니티이기도 하지만, 한자로 사람인자에 무늬 결 문(文)자 잖아요. 천문은 하늘의 무늬고 지문은 땅의 무늬잖아요. ‘터무니없다’는 말이 터의 무늬가 없다는 뜻인데, 풍수지리적으로 봤을 때 좋지 않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인문은 사람의 문맥을 읽어야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배운다’는 것은 무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그 안에 콘텍스트가 많이 들어가 있는 거죠. 텍스트가 던져졌을 때는 콘텍스트까지 이해하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문맥도 명확하게 밝히니까 읽기 쉬운 것이고, 또 거꾸로 그게 섞여 있기 때문에 철학자의 글을 읽고 자기 주변을 돌아보면 하나의 등불이 돼서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자기 삶의 문맥도 볼 수 있는 거죠. 그게 도움이 되는 거고요. 어쨌든 모든 오해와 갈등은 콘텍스트를 읽지 않으려고 할 때 생겨요.
나를 볼 때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대상을 볼 때는 주관적인 시선이 필요해요.
나인 것처럼. 그러면 다르게 보이죠.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절망에 빠드리는 수단은 양적 수치와 점수예요. 아이들한테 100점, 90점, 80점 점수 대신 포도상, 사과상 같은 이름을 만들어도 아이들은 다 알아요. 상 자체를 만들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상 때문에 청소를 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청소를 하고 싶을 때 하게 해야죠. 상이나 입시자체가 문제고, 누군가를 낙오시키는 시스템 자체가 문제잖아요. 모든 스펙은 네가 왜 떨어졌는지, 그 이유를 합리화하려는 제도로서 만들어진 거예요. 떨어뜨려야 되니까, 경쟁에서는 그게 중요하니까요.
기성세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의 위계를 공유하지만 젊은 친구들은 위계가 없잖아요. 그들을 일정 부분 아이같은 구석이 있어요. 어떤 젊은 친구가 진지한 고민을 이야기하고 기성세대와 다른 얘기를 할 때, 배워야 돼요. 철학자와 어린아이가 어느 정도 일치가 돼요. 젊은 친구들도 그렇구요. 차별은 위계질서가 굳어지고 우선순위가 매겨진 기존 사회에서 물려받은 거예요.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그런 거죠. 새롭고 낯설게 생각하는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현실은 굉장히 슬픈 일인 것 같아요.
변화하니까 덧없는 것이 아니고, 늙어가니까 꽃이 시드니까 그렇게 변해가니까 소중한 거예요. 무상(無常)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가르침이에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거예요.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소중한 것이 뭘까’라는 질문을 해야 돼요. 우리 모두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소중한 거예요. 우리는 불변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아요.
불교의 핵심 가르침 중에서 하나가 고(苦)잖아요. 일체개고. 살아있다는 것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에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타인들의 고통을 느끼는 거예요. 고통스러운데 왜 사냐고요? 고통이 완화되는 느낌이 행복이거든요. 좋은 음악을 듣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을 느끼잖아요. 죽으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행복도 없어요.
타자의 고통에 민감하다는 것은 곧 지려는 찬란한 벚꽃, 미세한 바람에도 벚꽃의 노쇠함과 죽음이 아니라 성숙함과 삶을 상징하는 것이에요.
누군가를 먹이기 위해서 음식을 했을 때 행복하잖아요. 기브 앤 테이크라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만남이 현재에 만연해요.

세 번째 만남, 팬데믹 그리고 언택트
유사 이래 어떤 세대는 전염병을 겪었고 어떤 세대는 전쟁을 겪었어요. 지금 40~50대가 전쟁을 겪지 않은 거의 유일한 세대고, 이제 전염병을 한 번 겪은 거예요. 전염병의 원인은 세계화에 있어요. 유사 이래로 전염병은 항상 있어 왔어요.
케인즈때 강화됐던 공공의료 체계를 대처 수상 때 다 날렸잖아요. 그러니까 영국에서 초기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 치료가 굉장히 힘들었던 거예요. 인류의 과학기술이 발달을 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전 세계적인 문제라고 하면 대비를 해야 된단 말이에요. 이득을 추구하는 의약회사가 미리 준비할 리 없잖아요. 세계화를 주도한 세력들이 책임을 져야 되는 문제예요.
플랫폼 기업들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회가 됐어요. 내가 남긴 소비의 흔적들이 플랫폼 기업의 자본이 되는 거죠. 자본주의가 쾌락과 불쾌, 혹은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기계적인 개인을 양산했어요. 자본주의는 공동체에서 쪼개진 개개인들이 생계를 걸고 참여하는 게임같은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보고요. 누군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필요를 만들 수 있는지를 분석해서 신제품을 만드는 것이 자본의 논리니까요. 소비자, 곧 노동계급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도록 강요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핵심 팽창 전략이예요. 과거 감시와 통제는 국가권력의 핵심 기능이었죠. 그러나 지금 감시와 통제를 주도하는 것은 국가라기보다 자본일 거예요.
자본의 팽창과 세계화 그리고 이어지는 상품과 인간의 이동 등, 이것이 팬데믹의 조건이죠. 대량 생산, 대량 이동은 전염병 전파를 가속화해요. 노동계급에게는 ‘자본을 통제하지 않으면 전염병은 또 온다’는 교훈을 준거예요.
스마트폰이라는 단말기가 묘수예요. 생산 현장이나 노동 현장을 증발시키고 소비 현장만을 부각시킬 수 있으니까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스마트폰은 우리 몸에 이식된 체제의 칩과도 같아요. 이 칩을 거치지 않고는 세계와 접속 할 수 없게 된 거예요. 결국 국가나 자본이 검열한 정보는 우리에게 들어오지 않죠. 이처럼 스마트폰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우리에게 안겨주기보다는 체제가 보았으면 하는 검열된 세상만을 보여줘요. 무서운 일이죠.
자본주의에서 상품의 역사는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는 역사예요. 자동차가 예전엔 사치품이었잖아요. 흥미로운 것은 새롭게 필수품이 되어버린 상품을 토대로 또 다른 사치품이 생산된다는 거예요. 물론 이 새로운 사치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새로운 필수품이 되죠.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강조하는 문명의 발달 혹은 진보의 맨얼굴이죠.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예요.
‘혁명은 폭주하는 기차가 멈추도록,
이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다’
- 벤야민
스마트폰이라는 매체가 시장이 됐잖아요. 벤야민이 예리하게 지적했어요. 결국 중요한 것은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는 자본주의적 운동을 통제할 수 있느냐의 여부죠.
하지만 인간에게 사치품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정말 끊기 힘든 거예요. 이 사치품을 쓰는 순간만큼은 당신은 고귀한 사람이고, 눈에 띄는 몇 안되는 도드라진 사람이 되는 거예요. 본능적으로 자본주의에 적응한 사람들, 새로운 제품과 소수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제품에 민감한 사람들이 생겨나요. 흔히 말하는 얼리아답터들이 좌절하는 상황이 있잖아요. 한정판으로 나온 옷을 어렵게 구입해서 입고 갔는데, 누군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거죠. 남들하고 다르지 않으면 교복이나 군복처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이기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환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교환이라면, 이타적 개인 혹은 사랑에 빠진 개인이 타인의 행복을 위해 교환하는 것이 사랑의 교환이자 공동체적 교환이에요.
낡아서 바꾸는 것이 아니고, 낡기 전에 바꾸니까요. 새로운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여유롭고 나아가 행복하다는 걸 과시하려는 허영때문이죠. 어떤 상품을 구매해 사용하느냐는 구매자의 사회적 위상이나 신분을 과시하는 효과가 있죠. 이것이 상징적 가치예요.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말한 것처럼 소비를 하는 이유는 그 물건의 사용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 제품을 샀을 때의 만족도 때문이죠.
파스칼의 <팡세>는 굉장히 재미있어요. 인간의 허영심을 그대로 보여줘요. 그저 허영 덩어리라는 거죠. 인간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고 보지 않았고 그저 무의식적 충동과 허영에 지배되는 존재라고 봤어요. <팡세>를 보면 인간의 잔인함, 이기적 욕망, 허영심을 이해할 수 있어요.
이기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환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교환이라면, 이타적 개인 혹은 사랑에 빠진 개인이 타인의 행복을 위해 교환하는 것이 사랑의 교환이자 공동체적 교환이에요. 자본주의 발달이 가족 공동체와 지역공동체를 와해시키는 거예요. 가족 구성원을 자본주의적 인간형으로 만들어버리니까 공동체를 유지하지 못하는 거죠.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되면 나한테 한 사람이 더해지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게 되잖아요. 이것을 자신에게 손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 취업도 힘든 요새 젊은이들은 결혼도 피하고, 결혼을 했어도 출산을 피하는 거예요.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길러졌기 때문이죠.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일수록 사회가 고령화되는 것도 이때문이에요. 자신만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개인이 어떻게 가족이나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겠어요. 우울하고 슬픈 일이죠.
국어의 키에서 준비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핵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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