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강의 성동구 논술! 국어의 키 입니다 :)

국어의 키 원장님께서 직접

강신주, 지승호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핵심 요약을 준비했습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저자강신주,지승호출판EBS한국교육방송공사발매2022.03.05.

두번째 요약본 !!

지금 바로 만나보실까요 ?


 이윤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아닌 좋은 책의 핵심을 요약한 책의 다른 시선입니다 ☆



네 번째 만남, 스마트폰 사회 경제학

자본주의는 매번 새롭게 변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유일한 체제예요. 4차 혁명의 핵심은 스마트폰이에요. 스마트폰으로 통제하는 거죠. 그거 없으면 안돼요. 그런데 그걸 우리가 산다는 거죠. 심지어 통신료 등의 요금을 내면서요. 실제로 우리가 스마트폰을 쓸 때 엄청난 이득을 얻는 측은 자본가들인데 말이죠. 4차 산업혁명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고, 그냥 스마트폰 혁명이라고 보면 돼요. 스마트폰, 즉 휴대용 인터넷 단말기 안에 세계 전체의 시장이 들어온 거예요. 스마트폰 경제가 발달할수록, 혹은 전자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수록, 그런 기계나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노령

세대의 삶은 위축돼요. 자본주의는 젊은 세대를 좋아해요.

 

MZ세대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기 힘들어요. 저항하기는 커녕 그들은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따라 움직이죠. 자신의 쾌락과 불쾌, 혹은 이익과 불리를 계산하는 벤담적 자아,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스마트폰에서 마침내 완성된 셈이죠. 자본의 생리는 모더니즘 취향인 거죠.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취향을

끊임없이 각인시키고 있어요.

 

나이든 세대도 부끄럽고 미안해야 되잖아요. 다음 세대가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놨느냐면, 그러지 못했잖아요. 그러면서 무슨 지적질을 해요. 어디 가서도 미안하다고 해야 되는 거죠. 1997년 IMF이후에 자본주의적 교육, 스펙 쌓기 교육을

강화하고,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하고 기업들은 외국 기업에 팔아먹고,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로 불안하고 위험한 노동환경에 몰아놓고, 자본 규제를 완화해서 청년들이 배달 노동이나 알바 노동 아니면 일자리도 없는 이런 사회를 만들어 놓았잖아요.

그런데 그 전에 대학 다녔던 사람들은 대게 정규직이거나 연금이 보장된 직장에 있잖아요. 그러면서 젊은 세대들한테 지적질을 하면 안 되죠. 우리 때는 어렵다고 좌절하지 않았어, 젊음은 극복이고 도전이고 이겨내는 거야. 이렇게 얘기하면 안되죠.

 

불행히도 젊은 세대, 즉 젊은 노동자들은 자본을 공격하기보다 늙은 노동자들을 적대시해요. 늙은 노동자들이 사라지면 자신들이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죠. 젊은 세대의 불행이에요. 어떤 사람들의 경험을 간접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거예요. 그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 지 그려볼 수 있잖아요. 그 배움의 기회를 날리는 거예요.

 


다섯 번째 만남, 작은 자본가들의 세상

 

좋은 사회는 자신이 생산한 것으로 노동하기 힘든 약자를 돌보는 사회예요. 당연히

이런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존중을 받죠. 노동이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약자를 돌보는

힘이니까., 노동이 존중을 받아요. 자유롭게 살다가 자유롭게 떠났으면 좋겠어요. 약자

라고 해서 지배하려고 하거나 부리려고 하지 말고, 강자라고 해서 굽신거리지 말고.

 

불교적 사유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요. 불교에서는 여섯 가지 바라밀을 이야기해요.

‘저 멀리 이르려고 한다’는 뜻인데, 즉 부처가 되는 여섯 가지 방법을 말해요. 보시는

타자와 나누는 적극적인 행위죠. 그 타자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듯 느껴져, 옷이나 음식을 나누는 거예요. 이렇게 주다 보면 벤담적 이기주의는 잦아들어요.

 

진보는 어려운 것 아니예요. 억압체제에 맞서 싸우는 것이고, 내면의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는 거예요. 억압체제와 맞서 싸우려면 연대와 유대가 필요하고,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려면 인간에 대한 사랑, 강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죠. 우리가 연대를 하는 이유는 누가 나를 지배하려고 할 때 그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에요.

내 자신의 욕망, 소유욕, 집요한 이기주의 이런 것들을 이겨내려는 담론적 전통이

바로 불교예요.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서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기르는 것이 진짜 교육이에요. 그런데 지금 교육이 그런가요? 사회 시스템에 맞추도록 가르치고, 자본의 이익에 도움이 될 수 있게 만들고, ‘국가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다짐시키고, 분업 체계에 적용되는 정보들을 미리 숙달시키고 있지 않나요? 억압체제에 저항하기 보다 억압체제에 잘 순응하는, 그리고 그 대가로 개인적

행복을 도모하는 벤담적 자아를 키우는 것이 과연 교육일까요?

 

자본이나 국가에 팔 수 있는, 다시 말해 자본이나 국가가 원하는 것을 익히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의 교육이에요. 결국 지금 우리는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간교한

억압체제에 살고 있는 셈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과거 노예제 사회나 지금 자본주의 사회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우리 사회가 강조하는 자유는 얼마나 기만적인가요. 제대로 된 교육의 핵심이 ‘내 말을 듣지 말라'는

건데, 우리는 지금 ‘내 말을 듣는 것이 네가 행복해지는 길’ 이라고 가르치는 거죠.

아닌데. 속상한 거죠. 좋은 교육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찾아주는 일,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이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만 한다면, 아이들은 이제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아낼 수 있는 길에 들어선 거예요.

 

힘들 수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찾은 아이들은 이미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아요. 그러니 국가나 자본이 땅에서 살기를 요구해도, 그들은 가급적 물을

떠나지 않으려 할 거예요. 한편으로는 자신을 노예로 만들려는 경향과 맞서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우리 아이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두가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갈 거예요. 여기에 바로 인류의 희망과 미래가 있죠.


 

여섯 번째 만남, 가족 공동체와 '기브 앤 테이크'의 세계

 

우정의 관계거나 사랑의 관계일 때, 우리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선물’이나 ‘불가능한 교환’의 관계에 들어가요. 그래서 정상적인 부모는 아이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죠. 또한 친구라면 아낌없이 그에게 무언가를 주게 돼요.

 

타인의 고통이 느껴져야 해요. 아이와 어른의 차이, 정확히 말해서 미성숙한 인간과 성숙한 인간의 차이를 다시 생각해보세요. 미성숙한 사람은 자신만 생각하죠. 나의 고통, 나의 불리함, 나의 불행, 나의 고독, 그리고 나의 배고픔만이 중요한 거예요.

반면 성숙한 사람은 타인의 불행, 타인의 외로움, 타인의 헐벗음, 한마디로 타인의 고통도 아프게 느껴요. 당연히 성숙한 사람은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들은 자본화 과정을 문명화의 과정이나 자유의 과정이라고 찬양해요. 하긴 대도시에서 누구도 취업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해서 자기를 팔아야 되는 그런 사회인거죠. 물론 팔지 않아도 돼요. 그건 개인의 자유니까요. 그러나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반드시 자신을

팔아야만 하는 사회가 어떻게 자유로운 사회일 수 있겠어요. 이미 퇴로는 차단되어 있어요. 주위를 둘러봐도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는 자본주의에 의해 거의 궤멸되었으니까요. 그 흔적이나마 남아 있는 공동체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예요. 벤담적 개인주의에 적응된 우리는 혈연 공동체마저도 불편하게 느끼니까요.

 

살린스가 말한 ‘석기시대 공동체’, 혹은 클라스트르의 ‘국가의 대항하는 사회’, 아니면 전자본주의 공동체는 교환의 논리가 아니라 전자본주의 선물의 논리에 따라 작동했어요. 개인주의 이기주의 보다는 공동체주의 이타주의가 지배적이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요. 이런 문맥에서 ‘가족’은 자본주의가 파괴했던 공동체의 마지막 형태라고

할 수 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본주의가 파괴하지 않고 남겨둔 마지막 공동체라고 할 수 있죠. 가족이 미래의 노동자를 기르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남겨둔 거죠.

 

말년의 보드리야르는 ‘불가능한 교환’에 대해 이야기해요. 주고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받은 것에 대해 완전히 등가적인 대가는 불가능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랑의 관계에서는 불가능한 교환이 이루어진다’라고요. 보드리야르의 논의는

마르셀 모스가 쓴 <증여론>의 영향을 받은 거예요. 모스가 원시부족 사회를 보면서

교환하고는 다른 ‘선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해요. 답례를 받으려고 선물을 주는

건 아니죠. 선물은 매번 새롭게 시작하는 거예요. 반면 자본주의는 모든 걸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요. 한마디로 말해서 자본주의는 선물마저 뇌물로 만든다고 할 수 있죠. 대가를 바라는 선물, 혹은 ‘기브 앤 테이크’에 포획된 선물은 뇌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메를리 퐁티의 최소폭력을 선택한다는 것이 중요해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다른 생명체를 파괴하거나 훼손하지 않고는 우리는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최소한의 폭력’이라는 생각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 개념을 가지면 우리는 지혜로워져요.

 

‘아! 음식을 남기지 말아야지. 음식을 남긴 만큼 나중에 다른 것을 또 죽여야 하니까' 라고 생각하게 되죠. 나아가 이 발상을 가지면 놀라운 변화도 하나 생겨요. 죽을 때쯤 되면 죽음이 행복하게 받아들여지죠. 이제 다른 것을 파괴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최소한의 폭력만을 허락하며 살아온 사람은 고뇌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왔던 거예요. 최소한의 폭력을 실천하면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먹기 위해 죽인 생명체뿐만이 아니라, 나를 돌봤던 가족들한테도 내 삶이 폐가 되지 않아야 해요. ‘나 때문에 아내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부모를 잘못 만나 우리 아이들이 힘들었다’ ‘나 때문에 지하철이 번잡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내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폭력이었다는 걸 알 거예요.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이 마치 권리라도

되는 양 살아가는 사람과는 다르죠.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내 목숨이나 식욕을 위해 물고기나 식물이 죽지 않고, 나를 돌봤던 내 자식의 삶, 내 아내의 삶, 남편의 삶이 덜 힘들어지겠다고 생각을 할 거예요. 그러면 목숨에 그렇게 연연할 수 없어요. 잘 살아온 사람들은 죽을 때 잘 죽어요. 내가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타인을 힘들게 했고, 얼마나 많은 생명체를 파괴했는지를 아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을 해보면 되는 거죠.


국어의 키에서 준비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핵심 요약

흥미로우셨나요?

 

저희는 다음 내용을 담은

다음 포스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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